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라크 전쟁 (문단 편집) === 점령지 관리 실패 === 병력이 적은 탓에 점령지역의 뒷정리가 미흡했고 그 때문에 전투부대의 뒤를 따라오던 비전투 병과의 피해가 컸다. 이유는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속도전 위주의 작전 때문이다. 선봉 전투부대는 적 방어선을 뚫어놓고 유유히 다음 작전지로 돌진하면 그만이지만 후속부대는 정신차리고 반격준비를 마친 적 방어 병력과 진짜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의 [[조지 패튼]]이 벌인 기동전이 그랬듯이 선봉에 선 패튼의 뒤에는 후속부대의 희생이 뒤따랐고, [[오마 브래들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두고 패튼을 비판하였다. 물론 현재는 이러한 돌파전이 [[독일군]]의 보급선과 지휘체계를 사전에 약화시키고 상대의 방어선을 교란해 장기적으로 보면 미군의 희생을 크게 줄인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소규모 정예 병력을 이용한 기동전으로 이라크군을 무너트리는 것은 철저히 럼즈펠드의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전쟁 중에는 놀라울 정도의 효율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라크군과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가 문제였다. 당시 [[에릭 신세키]] 미 육군 참모총장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안정화를 위해선 침공 때보다 훨씬 많은 40-50만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이를 철저히 씹었을 뿐만 아니라 "침공보다 점령에 병사가 더 필요하다니 그 사람 제정신인가."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신세키를 비웃었다. 이는 신세키의 임명자가 [[빌 클린턴]]이었던 점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진짜 정신나간 인간은 럼즈펠드가 되고 말았다. 공격이야 화력만 우세하면 어떻게든 되지만 치안유지는 화력우세만 가지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아주 기초적인 군사상식도 몰랐다는 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똑같은 상황을 30년 전에 겪어본 사람이… 그것도 모자라 신세키의 임기가 1년 가까이 남았는데도 후임자로 [[예스맨]] [[피터 슈메이커]]를 지명해버림으로써 신세키의 리더십은 무너졌다. 신세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고 기존 [[이라크군]]도 치안유지에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장군들도 전부 짤렸다. 럼즈펠드의 전략은 정규군과 정규군의 전쟁이었다면, 또한 이라크가 미국과 유사한 서양 기독교 문화권, 또는 한국, 일본과 같은 서방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가였다면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는 1932년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서 독립한 이후 하심 왕조의 전제군주제가 지배하다가, 1958년 군부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성립된 뒤에도 민주주의적인 체제가 아닌 군부와 바트당 등 특정 엘리트 세력들의 권위주의적 독재 체제로 국가가 경영되어 오는 등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의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었음에도 식민지 독립 후 민주주의 정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국가였다. 거기에 전후처리에서도 미국의 무능과 부패가 겹치면서 오히려 후세인 정권 때가 나았다는 의견이 이라크 민중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이 기존 이라크군과 경찰력을 모조리 해산시켜버리면서, 이라크 전역에 엄청난 숫자의 반군이 출현하였다. 현지 문화에도 불친절해서 민심을 얻지 못하며 고질적인 병력 부족 때문에 치안유지도 제대로 못하는 미군과 구 체제의 잔당과 이슬람 근본주의가 결합한 다수의 무장세력 간 내전이 된 것이다. 다만 럼즈펠드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장군들의 말을 따르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당시 미국의 국력은 그 이상의 군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돈을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그보다 더 병력을 늘리게 되면 군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징병제]]인 한국의 현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국방예산의 주요 부분은 장비가 아니라 인건비다. 이라크 주둔 병력을 두세 배 늘린다는 것은 그 병력뿐만 아니라 이들과 순환할 수 있는 병력까지 합해서 수십만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미국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부시의 정책과도 모순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미국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나라살림 어려운 줄 알면서도 굳이 이라크를 쳐서 전선을 2개로 늘린 [[네오콘]] 그 자체였다. 그런데 사실 이라크 치안 문제는 후세인 축출 후 이라크의 치안유지 인력을 제대로 보존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래도 부담이 덜어지는 문제였다. 이미 오랜 전쟁으로 각 부족 별로 따로 살고 있었던 데다가 탈레반도 활개치고 교육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어 문맹률이 높은 아프가니스탄과는 달리, 이라크는 1980년대 이후로는 전쟁과 경제난의 여파로 크게 낙후되었다지만 그럼에도 [[오일 쇼크]] 당시에 쌓아놓았던 기반 자체가 완전히 아작나지 않은 준 근대화 국가였으므로 군대와 경찰의 수는 충분했다. 미군이 이 인력을 그대로 치안유지로 돌렸다면 미군이 짊어질 부담은 매우 줄어들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문제는 [[이라크 연합국 과도 행정처|CPA]]의 폴 브리머가 독단으로 이라크군을 전부 해산시켜버리고 바트당원들도 숙청해버렸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